미루어진 착공날자
많은 세대들이 새 집이 일떠설 때까지 당분간 철거하여 동거를 하게 되였다. 그런데 막상 이사를 하자고보니 김장독이 제일 문제였다. 그것은 언땅을 파헤치고 힘들게 꺼낸 김장독을 가지고 이사를 가다가 독이 깨지거나 또 옮기는 과정에 김치맛이 변하게 되면 애써 담근 한해 절반량식이 수포로 돌아갈 우려가 있었기때문이였다.
그러나 철거세대들은 누구 하나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있었다.
그러던 1970년 1월 중순 어느날 전화로 평양시의 한 일군을 찾으신
그 일군은 착공준비를 다 갖추었는데 철거사업이 지체되여 건설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지 못하고있다고 사실대로 말씀드리였다.
그의 대답을 들으신
순간 그 일군은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그해 11월에 열리게 될 력사적인 우리 당 제5차대회전으로 끝내기로 계획한 건설을 정월에 시작해도 기간이 촉박한데 석달씩이나 더 미룬다는것은 도저히 생각할수 없는 일이였던것이다.
그의 속마음을 헤아려보신듯
그제서야 그 일군은 착공날자를 미루자고 하시는
그리하여 그해 천리마거리건설은 철거세대들이 불편이 없도록 예정날자보다 석달이나 미루게 되였다.
정녕 이것은 우리 인민을 제일로 사랑하시고 우리 민족의 고유한 풍습을 귀중히 여기시는 우리 수령님께서만이 내리실수 있는 대용단이였고 위대한 인민사랑의 조치였던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