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과 김옥균

   갑신정변(1884년)은 개화파가 단행한 우리 나라 력사상 첫 부르죠아개혁이였다.

   그러나 오랜 력사적기간 갑신정변에 대한 평가를 잘하지 못하여 이러한 사실은 력사의 이끼속에 묻혀있었고 갑신정변을 주도한 김옥균에 대하여서도 옳바른 평가를 내리지 못하고있었다.

   지난날 일부 사람들은 갑신정변을 궁중에서 일어난 단순한 권력싸움으로 보았으며 개화파와 일본사이의 이러저러한 접촉을 피상적으로만 보면서 김옥균을 친일파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일찌기 이 문제를 주체성의 원칙, 력사주의적원칙, 과학성의 원칙에서 바로잡아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주체52(1963)년 5월 6일 학생들에게 갑신정변의 전모를 옳게 파악하기 위하여서는 당시 개화파와 일본사이의 관계문제와 정변의 부르죠아적성격을 명백히 밝혀야 한다고 교시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력량상 수구파에 비하여 미약한 상태에 있었던 개화파는 나라의 근대화를 실현하기 위하여 안속은 주지 않으면서 일본군대를 리용하려고만 하였다는것, 그것은 정변당시 개화파는 왕궁으로 통하는 4개의 문에 자기 파의 무장성원들로 경비를 세우고 일본군대는 왕궁밖에 배치한데서 잘 알수 있다고 력사적사실들을 들어가며 하나하나 설명해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개화파가 자기의 정강에서 임오군인폭동 때 청나라에 랍치당해간 대원군을 가까운 시일안으로 돌아오도록 하며 청나라에 대한 굴종적인 《조공허례》를 페지할데 대한 문제를 제기한것, 문벌을 페지하고 인민들의 평등한 권리를 제정하며 재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할것을 선언한것 등은 갑신정변이 궁중에서 일어난 단순한 권력싸움이 아니라 나라의 근대화를 목적한 부르죠아개혁이였다는것을 잘 보여주고있다고 교시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게서는 주체53(1964)년 1월 28일 학생들의 론문집필을 지도하시면서 김옥균의 《회사설》과 《치도략론》에서도 그가  친일파가 아니라 우리 나라의 근대화를 위하여 활동한 부르죠아개혁운동가라는것을 잘 알수 있다고 교시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김옥균은 회사제도의 도입으로 나라의 근대적발전을 이룩하려고 하였는데 이것은 자본주의발전의 미숙성으로 하여 개별적자본가들의 수중에 축적된 자본의 규모가 크지 못하였던 우리 나라의 조건에서 대규모의 자본주의적기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가장 합리적인 길이였다고 교시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김옥균은 《치도략론》에서 교통운수의 발전을 국가정치의 요점의 하나로, 나라의 발전수준을 보여주는 기준으로 인정하면서 그에 무관심한 봉건통치배들을 비판하고 교통운수를 발전시키기 위한 방도들을 제기하였는데 이것은 나라를 근대화하기 위한 그의 립장을 잘 보여주고있다고 교시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갑신정변은 비록 광범한 인민대중의 힘에 의거하지 못하고 몇몇 인물들에 의한 상층개혁의 방법으로 부르죠아개혁을 시도한것으로 하여 실패를 면할수 없었지만 우리 나라가 봉건통치배들의 무능력과 외세의 침략과 간섭으로 인한 진통속에서도 자기 발전의 합법칙적로정을 따라 끊임없이 전진하고있었다는것을 뚜렷히 확증해주고있다고 가르쳐주시였다.

   이렇듯 위대한 장군님의 현명한 령도가 있어 친일파로 락인되여 력사의 반동으로 묻힐번 했던 김옥균은 부르죠아개혁운동의 선구자로 자기의 모습을 되찾게 되였으며 우리 나라 근대발전사의 합법적인 로정에 대한 옳바른 평가를 내릴수 있게 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