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왕릉을 고려태조릉답게 꾸려야 한다시며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시에는 만월대, 남대문, 왕건왕릉, 경효왕릉, 고려성균관, 숭양서원, 선죽교를 비롯한 고려시기의 력사유적들이 많이 분포되여있다.
주체81(1992)년 5월 5일
당시 왕건왕릉으로 가는 길은 농촌길이여서 매우 험하였다.
그러나 왕릉의 주변은 어수선했고 제단도 허줄하였으며 릉둘레에 만들어놓은 란간도 못쓰게 된 그대로 있었다.
그러시면서 동무들이 묘를 이렇게 거두었으니 왕건왕이 땅속에서 조상도 몰라보는 후손들이라고 욕할수 있다고 교시하시였다.
왕건왕은 개성지방의 유력한 봉건세력이였던 태봉국의 무관이였는데 그는 19살에 성주가 되고 41살에 왕이 되였다.
왕건은 고려를 세운 다음 신라와 후백제를 통합하였으며 고구려를 계승한 우리 나라의 첫 통일국가인 고려의 국력을 세상에 널리 떨치였다.
우리 나라를 오늘 코레아(영어), 코레아(도이취어), 까레야(로어), 꼬레(프랑스어)라고 부르는것은 근 500년의 력사를 가진 고려의 국호를 념두에 둔것이다.
그러나 우리 일군들은 쌍릉형식으로 웅장하게 꾸려진 경효왕릉에 대하여서는 력사적가치가 있는것으로 보면서도 왕건왕릉에 대해서는 관심밖에 있었다.
그러시면서 외국손님들에게 왕릉을 보여주어야 할 일이 있으면 먼저 고려태조왕이였던 왕건왕릉을 보이고 그 다음에 경효왕릉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그러자면 왕건왕릉으로 가는 길을 곧추 내고 릉주변을 정리하며 주변을 항상 깨끗이 거두어야 한다고 교시하시였다.
왕릉의 1층단까지의 높이는 15메터인데 동서로 40메터, 남북으로 24메터인 1층단 중앙에는 왕의 무덤과 왕비의 무덤이 놓여있었다.
무덤밑둘레에는 쥐, 소, 범, 토끼 등 12지신상을 부각한 병풍돌이 둘러져있었고 두 무덤의 란간밖으로는 빙돌아가면서 돌범과 돌양이 엇바꾸어가며 놓여있었다. 그리고 2층과 3층단 좌우끝에는 문관과 무관을 형상한 돌조각상들이 놓여있었다.
참으로 릉은 높은 수준에서 형상된 돌조각들이 구색이 맞게 배치되였기때문에 일종의 《석조예술박물관》을 방불케 하였다.
사실 경효왕은 자기 처와 자기 무덤은 근 10년이나 인민들을 동원시켜 굉장하게 만들었지만 조상인 왕건왕릉은 관심밖에 내버려두었던것이다.
그러시고는 수행원들을 둘러보시며 우리도 고려의 후손들이 아닌가, 고려의 후손들인 우리들이 그의 릉을 잘 꾸려주지 않으면 후손들이 우리를 욕할수 있다고 교시하시였다.
그이께서는 력사학자들이 모여 왕건왕릉를 어떻게 꾸리겠는가 하는것을 토론하여보는것이 좋겠다고, 왕건왕릉에 경효왕릉처럼 돌로 문관과 무관, 범이나 말 같은 조각상도 만들어 세우면 웅장해질수 있다고, 릉주변에 소나무를 비롯하여 빨리 자라는 나무도 많이 심어 릉의 품격을 갖추도록 하여야 한다고 교시하시였다.
계속하여 그이께서는 우리 집에서 키운 잣솔나무가 크게 자랐기때문에 광복거리에 보내주었는데 아직 잣솔나무가 있으니 그것을 왕건왕릉에 가져다 심어주자고 하시였다.
순간 일군들은 민족의 력사유적을 그토록 귀중히 여기시는
이 소식을 전해듣고 너무도 감복하여 조선봉건왕조성립이래 가혹한 박해를 피하여 자기의 성씨마저 숨기고 살아오던 왕씨가문의 후손들은 조상대대로 가보로 물려오던 왕씨가문족보를 비롯한 귀중한 유물들을
주체83(1994)년 일군들과 인민들은
이처럼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자취가 사라져가던 왕건왕릉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