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원시조를 찾아주시여
평양시 강동군 문흥리 대박산마루에 우리 민족의 원시조의 무덤인 단군릉이 웅장하게 개건되여 반만년의 민족사는 더욱 빛나고있다.
수수천년 력사의 풍운속에서 신화적존재로만 전해져오던 단군이 실재한 인물이며 우리 민족의 원시조라는것을 해명하는 민족사적대업은
수천년세월 한피줄, 하나의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한강토우에서 살아온 우리 인민은 예로부터 민족의 시조 단군에 대한 숭배심이 매우 강하였다.
고조선사람들에 의하여 창작된 단군신화는 당대의 의식한계에서는 최고의 높이로 형상된 단군숭배정신의 결정체라고 할수 있다.
고조선이 멸망한후 단군에 대한 숭배정신은 고구려사람들에게 전승되였다.
고구려사람들은 자기 나라의 건국시조 주몽왕(동명왕)을 단군의 후손으로 생각한데로부터 자기 나라 건국시조 동명왕릉과 함께 단군릉도 개건하였다.
신라사람들도 단군에 대한 숭배정신이 높았는데 후기신라의 유명한 화가 솔거는 단군에게서 붓을 받는 꿈을 꾸고 그 붓으로 그림을 그렸기에 당대의 이름난 화가가 되였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단군의 은덕을 잊지 못하여 꿈에서 본 단군의 화상을 1000여상이나 그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게 되였다.
고려사람들은 단군을 우리 나라에 존재한 모든 나라들의 공동의 원조상으로, 우리 나라 첫 개국시조로 인정하였으며 구월산에 단군사를 지어놓고 단군에 대한 제사를 지내였다.
고려말 조선봉건왕조초 우리 선조들은 동방에서 나라를 차리기는 단군의 조선으로부터 시작되였다고 하면서 《단군조선》을 우리 민족사의 첫 왕조로 인정하였다.
조선봉건왕조시기에도 구월산의 단군사, 평양의 숭령전은 물론 우리 나라의 그 어디에서나 단군에 대한 제사를 지냈고 조선봉건왕조말에는 보통학교 력사교과서들에 단군이 소개되였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이러한 전통적관념은 조선을 강점한 일제의 단군말살정책에 의하여 여지없이 짓밟히였다.
일제는 조선을 강점한 첫날부터 조선인민의 민족자주의식을 말살하고 저들의 조선침략과 지배를 합리화할 목적으로 단군에 대한 우리 선조들의 숭배심을 말살하려고 날뛰였다. 그것은 옛기록에서 전하는 단군조선의 건국년대(기원전 2333년)가 저들의 건국신화에서 전하는 국가기원년대(기원전 660년)보다 근 1700년이나 앞서게 되므로 단군조선에 대한 력사기록을 무시하고 단군을 말살해버리지 않고서는 《우수한》 야마도민족이 《렬등한》 조선민족을 지배해야 한다는 날강도적인 식민지지배설을 합리화할수 없었기때문이였다.
이로부터 일제는 강점초기에 벌써 수많은 경찰들을 동원하여 전국각지의 책방들과 향교, 서원, 개인집들까지 샅샅이 뒤지여 단군관계력사책들을 강제압수하여 모조리 불태워버렸으며 어용학자들을 동원하여 단군을 불교도들이 꾸며낸 허황한 신적존재로 애써 《론증》하고 교활하고 악랄한 방법을 다 써가며 그를 조선력사에서 말살해버리였다.
실로 근대 우리 민족의 망국사는 나라잃은 민족은 조상도 잃게 된다는 피의 교훈을 남기였다.
해방후 지금까지 비록 조상전래의 단군에 대한 신화적인 전설이 많이 전승되였다고 하지마는 일제의 단군말살정책의 영향으로 사람들은 단군이 과연 실재한 인물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의견이 분분하였다.
오래동안 단군과 고조선문제연구에 종사해온 력사학자들도 많고많은 단군신화를 실재한 사실의 반영으로 보고 그에 따르는 유적을 찾기 위하여 노력한것이 아니라 신화분석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있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우리 력사학자들의 안목을 단군유적발굴에로 돌리도록 이끌어주신 분은
그리고 혁명과 건설을 령도하시는 그처럼 바쁘신 속에서도 손수 력사책들을 연구하시고 력사학자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문제들도 일깨워주시였다.
주체81(1992)년 9월 어느날
이렇듯
단군릉과 관련한 력사기록들을 체계적으로 조사한 력사학자들은 현지에서 릉을 보고 주민들과 담화한데 기초하여 자료를 정리하는 과정에 강동군의 단군릉을 부인할 근거가 없다는 결론을 짓게 되였다.
이에 대한 보고를 받으신
이 릉이 일제에 의하여 도굴당하였다는것을 알고있던 력사학자들은 무덤에서 그 어떤 가치있는 유물을 얻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다만 무덤형식이나 확인하고 그 축조시기를 밝히며 이 무덤을 《단군릉》으로 불러온 까닭이 무엇인가 하는것을 해명하는데 도움이 되는 그 어떤 실마리라도 잡아볼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것이 그때 력사학자들의 생각이였다.
그러나 발굴과정에 주검칸 바닥에서 사람의 뼈가 드러나기 시작하더니 금속왕관앞면장식, 금동왕관쪼각, 패쪽, 도기 등이 나타났다.
실로 이것은 뜻밖의 일이였다.
발굴과정에 나타난 이런 사실을 료해하신
단군릉에 대한 발굴사업을 일단 끝낸 력사학자들은 뼈에 대한 감정사업과 함께 년대측정사업을 낮에 밤을 이어 긴장하게 진행하였다.
이런 실태를 료해하신 위대한
그리하여 단군의 뼈에 대한 년대측정사업이 구체적으로 진행되였는데 그에 의하면 단군이 그때로부터 약 5011년전에 태여난 실재한 인물이라는것이 론박할 여지없이 확증되게 되였다.
발굴정형을 보고받으신
그이께서는 묘뒤에 사람들이 무덤안에 들어가 볼수 있게 문을 만들고 무덤안에 10여명의 사람들이 들어가 마음대로 움직일수 있도록 하며 새로 발굴한 단군과 그 안해의 유골을 유리관에 넣고 아르곤가스를 채운후 밀봉하여 무덤안에 보관하여야 한다고 하시면서 유리관앞에 놓을 해설문을 어떻게 써야 한다는 내용까지 상세히 가르쳐주시였다.
그러시고는 단군릉개건공사를 성과적으로 보장하기 위하여 단군릉복구위원회를 내오고 단군릉을 잘 꾸리기 위한 사업을 짜고들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앞으로 단군과 고조선의 력사를 더욱 깊이 연구할데 대해서와 단군의 유골이 발굴되고 그 년대가 과학적으로 밝혀진 조건에서 단군이 고조선을 세운 년대를 새롭게 정할데 대하여 간곡히 교시하시였다.
그이께서는 민족주의자들이 단군릉을 지켜내기 위해 단군릉수호회를 조직하고 돈을 모아 릉을 꾸리고 단군의 기적비도 세웠다고 하는데 단군릉 수호회 회장이였던 김상준이 비록 대지주였지만 단군릉을 꾸린것을 보면 조선민족의 넋이 살아있었다고 하시면서 그를 애국자라고 높이 평가해주시였다.
그이께서는 단군릉에 동명왕릉과 같이 조선봉건왕조시기에 세운 비석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런것이 없다고 못내 아쉬워하시며 릉에 있는 이 기적비가 일제시기에 세운 비석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력사자료로는 되니 잘 보존하라고 교시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주체25(1936)년에 단군릉을 수축하면서 릉앞면 좌우에 세운 돌사자를 가리키시며 조그마한 강아지 같다고 하시면서 우리 나라에는 사자가 없고 범이 있는데 릉앞에 사자를 만들어놓은것은 잘못되였다고 교시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시며 머리뼈가 없는것이 유감이라고 하시며 없어진 뼈들을 모조품으로 만들어서라도 진짜뼈와 맞추어 사람의 전신골격을 유리관에 놓고 릉안에 안치해야 한다고 교시하시였다.
이처럼 단군릉을 돌아보신
잠시후 현재 개건된 단군릉앞도로에 이르신 그이께서는 도로에서 가까운 야산봉우리를 가리키시면서 단군릉을 개건할 자리로서는 문흥리 고인돌유적이 있는 이 야산마루가 제일 좋은것 같다고, 이 야산마루에 올라서면 앞이 탁 트이여 멀리까지 바라보이고 도로에서도 가까와 다른 나라 사람들이 자동차를 타고 참관하러 오기도 편리하기때문에 여기에 단군릉을 건설하면 좋을것이라고 하시면서 도로에서 릉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내는 문제, 참관길을 산등성이를 따라 낼데 대한 문제 등 릉건설과 관련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그때로부터 이틀후
45정보의 넓은 면적에 1994개의 화강석을 다듬어 9단으로 높이 22메터, 밑단이 50메터인 정사각형모양의 피라미드식 돌무덤인 단군릉이 로동당시대의 또 하나의 걸작품으로 훌륭히 솟아났다.
10여명의 인원이 동시에 들어가볼수 있는 무덤칸에는 단군과 그의 안해의 유골이 안치된 2개의 유리관이 대돌우에 놓여있다. 그리고 릉의 네귀에 용맹스러운 조선범돌조각과 비파형단검을 형상한 4개의 검탑이 서있으며 계단 량옆에 단군의 아들들과 신하들의 조각상을 비롯하여 정교하게 가공된 돌조각들이 세워졌다.
우리 인민들은 훌륭하게 개건된 단군릉을 볼 때마다 오랜 세월 력사의 이끼속에 묻혀있던 단군을 민족의 원시조로 찾아주시고 시조릉답게 개건하기 위하여 온갖 로고를 다 바치신 민족의 어버이, 절세의 애국자, 대성인이신